인간계산기 - 맥스 슐만

단편 소설.

나는 차체가 길고 늘씬한 컨버터블 자동차 한 대를, 역시 키가 크고 늘씬한 포피 허링이라는 여자애와 함께 타고다닌 적이 있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포피의 몸매였다. 단지 몸매 뿐이었다. 그녀의 매력은 오로지 신체적인 데에 있었다.


심적이나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우리는 몇 광년만큼이나 떨어져 있었다. 나는 예민했고 그녀는 둔했다. 나는 낭만주의자였고 그녀는 상업주의자였다. 내가 플루트라면 그녀는 트럼펫이었다. 내가 해묵은 상아라면 그녀는 스테인리스 스틸이었다.




그러나 미의 숭배자였던 나는 그너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황홀할 정도였기 때문에 그것을 다 숭배하려면 또 한 사람의 남자가 있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균형미, 허벅지의 선, 음악과도 같은 움직임, 폭 꺼졌다가 다시 솟아오르는 몸의 굴곡 ..... 이 모든 것들 앞에서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바로 미쳐버린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1학년 봄학기 개강 첫날, 스네이스 교수의 영어수업 시간이었다. 나는 약간 일찍 교실에 도착했다. 포피는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시골 소녀같이 스커트와 헐렁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어서 크림빛을 띤 한쪽 어깨가 드러나 잇었다.




나는 여자 쪽으로 돌아앉아 숨김없이 찬탄의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약간 안절부절 못하는 듯한 미소를 짓더니 블라우스를 끌어올려 드러난 어깨를 가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편 어깨가 드러났다. 나는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블라우스를 잡고 양쪽 어깨 위로 끌어올렸다. 이것이 또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녀에게 그랬다는 것이지 나한테가 아니다). 블라우스의 목선이 넓어져 가슴이 깊이 파여버린 것이다. 나는 기쁜 듯이 손뼉을 쳤다.




"눈두덩 한번 맞아볼래?" 그녀가 쏘아붙였다.

내가 부드럽게 대답해줄 말을 생각하고 있는데 스네이스 교수가 걸어 들어왔다.




"나중에 애기하자." 나는 이렇게 속삭이고 교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교수는 체구가 그렇게 당당하지는 못했다. 그는 자그마하고 구부정한 사람이었다. 우둘투둘한 머리통 위에는 단지 몇 가닥의 백발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눈은 마치 구슬 같았고 코는 지나치게 길었으며, 앏은 입술은 곡선을 그리며 축 처져 있었다. 낡은 푸른색 양복은 반질반질하니 희미하게 빛나는 것이 마치 영구차의 표면 같았다.




교수는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나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네이스 교수는 저명한 학자였던 것이다. 그가 쓴 책 《스네이스 영문법》은 미국에 있는 수백 군데의 대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문법과 용어 사용법에 있어서 그는 학계에서 30년 이상 인정받고 있는 권위자였다.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 또한 영어 용법에는 어느 정도 전문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문필가가 되겠다는 야망이 있었기에 자연히 영어 용법에도 관심이 갔던 것이다. 나는 나의 모국어를 주의 깊게 견구하는 데에 수년간의 세월을 바쳤다. 전국을 다 통틀어도 나만큼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열여덟 살의 젊은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방면에 있어서 나의 지식이 아무리 방대하다 할 지라도 스네이스 교수 같은 전문가에게서는 배울 점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미네소타 대학에 들어온 이유도 스네이스 교수가 그 곳에서 교편을 잡고 잇다는 점 때문이었다.




교수는 교탁을 탁탁 쳐서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학생들이 조용해지자 그는 말을 꺼냈다.

"학기 첫날이니 만큼(Owing to the fact that this is the first day of class), 오늘 수업은 일찍 끝내주겠다." 그는 말했다. "여러분은 내가 'due to'가 아니라 'owing to'라는 표현을 쓴 데에 유의해야 한다. due to는 be 동사와 같이 쓰여야만 옳다. 예를 들면 '야구 경기를 뒤로 미룬 것은 비가 왔기 때문이다'라고 할 때 'The postponement of the ball game was due to rain.'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Due to rain the ball game was postponed.'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손을 들었다.

"뭔가?" 교수는 성급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친숙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교수님, 저는 교수님께서 탁월한 언어학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말씀드린다고 해서 제가 교수님을 존경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잘못됐다고?"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연민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교수님. 교수님께서는 due to 앞에 반드시 be 동사가 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그렇지만 저는 be 동사 없이도 그 표현을 씁니다. 우리 식구들도 모두 그렇게 하죠. 제 친구들도 그렇고요. 저하고 얘기해본 사람들은 다들 그런 표현을 썼어요. 그런데 교수님은 그 표현이 잘못됐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수님 눈을 뜨십시오. 사람들이 다 잘못되었고 교수님만 옳습니까?"

교수는 입을 딱 벌렸다.




"언어란," 나는 가장 좋아하는 화젯거리에 열을 올려가며 말을 계속했다. "살아있는 것이며, 자라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살아있고 자라나며 변화하느냐? 물론 사람들 때문이죠. 언어는 사람들에게 속해 있으며,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곧 옳은 문법입니다. 옳고 그른 것은 고색창연한 문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달린 것이죠.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은 교조주의자이며, 보수주의자이고, 진부한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교수의 얼굴이 기묘한 흙빛으로 변했다. 입술 주위만이 백짓장 같아서 흡사 생기를 잃은 흑인 가수의 모습이었다. 그는 멏 분 동안 말도 나오지 않는 것 같았으나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40년 동안 박봉의 교수직에 몸바쳐 왔네." 그는 노여움을 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아둔한 소리들도 꽤 많이 들어봤지만 자네처럼 아둔한 소린 처음이네. 최근 사춘기를 거치느라 자네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져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겠어."




그러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학문과 무수한 석학들의 노력 덕분에 영문법이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나? 억측만을 일삼는 사람 같으니라구. 어떻게 감히 공장 일꾼이나 여인숙 아줌마, 대학 초년생들이 사용하는 비문법을 정통 용법 대신 사용하자고 제안할 수가 있나?

이 얼간이 야만인 같으니, 맥컬리와 애디슨 같은 학자들의 고상함을 비천한 톰, 딕, 해리 같은 사람들이 지껄이는 거친 언어와 맞바꿀 셈인가? 용법에는 규범이라는 것이 확립되어 있어. 이 규범은 학습을 통해서 강화되어야 해. 상스러운 물결이 나의 문지방위로 넘어 들어오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네. 앞으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자네 머릿속에나 넣어두게."




"하지만 교수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나는 외쳤다. 그러나 그의 눈빛을 보자 그만 기가 죽고 말았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늘 수업은 이만. 이 과정의 교재는 《스네이스 영문법》이다. 교내 서점에 가면 구할 수 있다. 내일 강의를 시작할 때는 다들 교재를 준비해 갖고 오기 바란다. 수업 끝."




나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지금 한 인간을 계몽시키려 했지만, 그 결과 무엇을 얻었는가? 모욕과 비방, 그것뿐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바보같은 늙은이 ! 진부한 독단만 한 보따리 싸들고 웅얼거리면서, 진보와 진리를 제시하는 자에겐 독사처럼 달려들다니, 그래, 언젠간 이 빚을 갚아주겠다. 그는 언젠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복도로 나오던 나의 눈에 건물 밖으로 걸어나가는 포피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나는 갑자기 밀어닥치는 갈망에 압도되어 방금 스네이스 교수에게 받은 수모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밖으로 달음질쳐 나가서 포피의 팔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나는 승리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팔 놔." 그녀는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아까 나를 훑어보던 늑대가 이제는 곰살궂게 굴고 있네."

"그건 오해야." 나는 항변했다. " 난 너에게 딱 맘 먹은 것 없어. 나는 너를 최고로 숭배할 뿐이야."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정말이라니까. 난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정말이지 예민한 사람이야. 너는 심미적으로 나의 마음을 끌었어. 너에 대한 시를 써볼까 생각하고 있었어."




"시를 쓰니?" 그녀는 내게 딱딱한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약간." 나는 눈을 내리깔고 솔직히 고백했다. "물론 썩 좋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어."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먹고 살기 힘들겠구나." 그녀는 잘라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에는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일들도 많지."

"어떤 것들?"

"진리와 미, 예술....."




"잘 가.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겠지."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나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 나는 외쳤다.

"이봐, 네 이름이 뭔진 모르겠지만....."




"도비 길리스"

"이봐, 도비 길리스. 나한텐 언니가 세 명 있어. 셋 다 결혼했고 아이들까지 있지. 1945년부터 지금까지 우리 언니 셋이 사들인 옷을 다 합해봤자 두 벌밖엔 안돼. 왜인지 아니? 모두들 토끼하고 결혼했기 때문이야."




"거 참 묘한 일이구나 ! " 나는 감탄했다. "진짜 토끼들인가?"

"아니, 바보 같긴. 우리 언니들이 아무런 목적도, 진취성도 없이 사는 남자들하고 결혼했다는 말이야. 형부 중에 한 사람은 깽깽이 연주자고, 또 한 사람은 수채화를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찰흙을 빚어. 진리, 미, 예술 그런거나 끌어안고 기어다니는 사람들이야. 그렇지만 형부들 중에 누구도 밥벌이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아하, 그래서 예술가를 사귀게 될까봐 두려워 하는군."

"그래." 그녀는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난 벌서 오래전에 내가 사랑에 빠질 남자는 단 한가지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어. 그건 바로 돈이야. 집안이 별로이고 셰익스피어 따위는 몰라도 상관없어. 돈버는 방법만 알고 있으면 돼."




"그러면 일부러 계획을 세워서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말씀인가?"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런 건 절대로 아니야. 난 지금 돈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을 찾는 게 아냐. 지금은 찢어지게 가난하더라도 나중에 확실히 돈을 벌 수 있을 사람이면 돼. 난 언니들처럼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아. 난 최고급 옷과 커다란 저택, 하인들, 그외에 좋다는 것은 모두 얻고 말겠어."




"흐음."

내 마음은 우울해졌다. 분명히 이 여자애하고는 잘해볼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잘 풀린다고 하더라도 대체 그 앞날에 무엇이 있겠는가? 무슨 로맨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그녀는 예술에 대해 격한 적개심을 갖고 잇었다. 반대로 나는 사업이나 돈 문제에는 완전히 무관심했다. 이번의 연애감정은 싹트려고 할 때에 죽여버리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천박한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그 몸매를 보면 그녀를 놓아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너무 아름다웠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큰 거짓말을 했다.

"네가 내 눈을 뜨게 해줬어. 이제부터 나는 돈버는 일외에 다른 것은 일체 생각하지 않겠어."




"그게 현명하지." 포피는 인정한다는 듯이 말했다.

"내 컨버터블 자동차 한 번 타보지 않을래?"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컨버터블 자동차를 갖고 있어?"




"뭐 대단치는 않아." 나는 이렇게 말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새 차도 아니고 그렇게 크지도 않았다. 하지만 컨버터블은 컨버터블이었고 나는 그것을 무척 아꼈다. 나는 언제나 그것을 깨끗이 닦아 윤기가 흐르게 했으며, 2개월마다 한번식 라디에이터 캡의 스쿼럴 테일을 갈아주고 있었다.




"정말 타보고 싶어." 포피가 말했다. "하지만 먼저 서점에 들러야 돼. 《스네이스 영문법》을 사야 되잖아?"

나는 내게 심한 괴로움을 주었던 그 이름을 듣자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그 고통은 곧 사라졌다. 저 찬란한 포피의 곁에 있으면 행복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 와봐."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계속 눈짓을 하면서 컨버터블이 있는 곳까지 그녀를 데리고 갔다.

우리는 차를 몰아 금세 해머스미스 책방에 도착했다. 이곳은 새 책과 중고 서적들을 파는 곳이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 해머스미스 씨가 다가오면서 기대에 찬 모습으로 통통한 손바닥을 비벼댔다.




"어서 오세요." 그는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네이스 영문법》 얼마에요?" 포피는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난처해져서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물건을 살 때 가격을 묻는 법이 없었다.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4달러 25센트요." 해머스미스 씨가 말했다.

"말도 안돼 ! " 포피가 소리쳤다. "그럼 헌 책은 얼마에요?"

"3달러 75센트."




"그럼 저보고 기껏 50센트를 아끼자고 헌 책을 사라는 말이에요?" 그녀가 따졌다.

"아, 꼬마 아가씨." 그는 책방 주인들이 흔히들 그러듯이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그 정도면 비용이 꽤 절약되는 것 아닙니까?"




"저한테 꼬마 아가씨라고 하지 마세요." 포피는 이렇게 쏘아붙이며 손가락으로 그의 살찐 턱을 쿡 찔렸다. 해머스미스씨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만일 어떤 학생이 와서 자기가 쓰던 《스네이스 영문법》 책을 팔면 얼마나 주시겠어요?" 그를 똑바로 쏘아보며 포피가 물었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얼마나 주실 거냐구요 ! " 그녀는 되풀이해 말하면서 그를 코너로 몰아붙였다.

"2달러 50센트 주지요." 그가 자백했다.




"뭐라고요?" 헌책 하나 팔아서 1달러 25센트나 챙긴다는 말이에요? 세상에, 도둑이군요 ! "




나는 굴욕감으로 몸을 비틀었다.

"제발. 포피. 책은 내가 사줄게. 받기만 해."




포피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조금도 마음이 가라앉은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차로 돌아오면서 줄곧 투덜거렸다. 나는 리버 로우드 쪽으로 차를 몰면서, 그녀가 제발 목가적인 풍경을 보고 그런 저급한 감정을 몰아내 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과연 나무로 뒤덮인 미시시피 강의 가파른 벼랑길을 달리는 동안 그녀는 잠잠했다. 저 아래에선 봄 기운이 풍겨나는 강물 위에 하얗게 거품이 일고있었다. 날씨는 따스했다. 공기에는 긴 겨울 잠에서 막 깨어난 대지의 달콤한 흙 내음이 스며 있었다. 한창 싹이 움트는 나무 위에서는둥지를 트는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었다. 차는 도로를 벗어나 풀로 뒤덮인 언덕에 멈췄다.




포피는 좌석 한 구석에 느른하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예뻤다. 부드러우면서도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포피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포피가 가만히 있어 그 손가락 끝에 키스했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 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네이스 영문법》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그녀는 몸을 세워 앉으면서 외쳤다. "말이 돼? 헌 책 한권을 팔면서 1달러 25센트나 챙기다니 ! "




그녀의 다리를 잡아서 언덕 밑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포피." 나는 이 불쾌한 화제를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곳 멋지지 않니? 하늘은 얼마나 파랗고, 풀은 또 얼마나 푸르고 구름은 얼마나 흰지, 그리고....."




"얘 ! " 그녀는 내 가슴을 탁 치며 소리쳤다. "좋은 생각이 있어. 왜 서점만 《스네이스 영문법》을 팔아 돈을 벌어야 되지? 우리가 하면 어때?"




"포피, 구름하고 풀, 하늘이....."

"내 말 들어봐. 우리가 2달러 60센트씩 주고 헌 책을 사는 거야. 서점에서 쳐 주는 돈보다 10센트 더 주는 거지. 그걸 3달러 65센트에 파는 거야. 서점에서 부르는 값보다 10센트 낮은 금액이야. 그러면 우리는 한 권에 1달러 5센트씩 벌고 학생들은 서점에서 책을 사고 파는 것보다 더 좋은 조건에 거래할 수 있잖아."




"저것 봐, 포피. 파랑새야. 저쪽에는 진홍풍금조가 있고."

"봄학기가 끝날 때쯤 책을 사들이자. 내가 가서 애들한테 서점 말고 우리에게 책을 팔라고 얘기할께. 여름에는 그 책을 갖고 있다가, 가을학기가 되면 신입생들한테 파는 거야.신입생 영어수업을 수강하는 애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니, 도비?"




"몰라." 나는 우울하게 말했다.

"적어도 300명은 될거야. 그럼 우린 315달러를 벌 수 있다는 얘기가 되지. 어때?" 포피는 쾌활하게 말하면서 우아한 손가락으로 내 갈비뼈 위를 쿡쿡 찔렀다.




"굉장한데." 나는 중얼거렸다.

"물론 책을 사려면 자본이 좀 있어야겠지. 어디 보자. 한권에 2달러 65센트씩 300권이면 780달러야. 그만한 돈 있니, 도비?"




"하 ! "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관찰하듯 내 컨버터블의 몸체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 차면 틀림없이 800달러는 받을 수 있을거야."




"안돼 ! " 나는 비명을 질렀다. 차를 파느니 차라리 갈비뼈를 팔리라. 나는 차를 사랑했다. 말 그대로 '사랑'했다.

"안돼, 안돼, 안돼." 나는 되풀이해 말했다.




"왜 안돼? 내년 가을이면 더 좋은 차를 살 수 있을텐데."

"난 이 차를 사랑해. 포피. 이제껏 내가 세차하고 윤을 내고 솔질을 했어. 나는 이 차와 '친밀한'사이라구. 내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겠니?"




"감상적이군." 그녀가 비웃었다. "이제 돈만 생각하기로 했다면서. 아, 내가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한번 토끼는 영원한 토끼라는 걸 말야. 날 집에 데려다 줘. 도비."




내 안에서 한 목소리가 외치고 있었다.

"좋아 ! 그녀를 집에 데려다 줘. 여자의 탈을 쓴 이 계산기를 없애버리란 말야."




그러나 다른 목소리가 이렇게 외쳤다.

"안돼 ! 그녀를 붙잡아. 잘 다듬은 저 몸매와, 깎아놓은 듯한 굴곡. 예술적인 다리를 생각해 보라구."




두 번째 목소리가 더 강했다. 아니 잘 알 수 없었다.

"이봐, 포피." 나는 애원했다. "차를 팔지 않으면 어때? 그냥 은행 같은 데서 대출을 받으면?"




"뭐라고? 이자를 빼면 우린 뭐가 남고? 멍청한 소리말아, 도비."

"그럼 차를 팔아야 된단 말야?" 나는 모든 희망을 잃고서 물었다.

포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는 한숨을 니쉬었다. "하지만 잠시 기다려.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돈이 필요없잖아."

"너무 오래는 안돼." 그녀가 주의를 주었다. "그러다간 시장이 사라져보릴지도 몰라."




그 후 몇 주 동안 포피는 끊임없이 내게 차를 살 사람을 알아보라고 졸라댔다. 이런저런 말들로 얼버무려 그녀의 공세를 막을 수는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차를 팔 생각이 전혀 없었다. 팔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나의 차와 헤어진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그러나 포피를 잃는다는 생각 역시 개운치 않았다. 나는 그렇게 개운치 않은 상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포피 때문에 겪는 어려움 외에 내 인생에 또 하나의 새로운 악몽이 다가왔다. 《스네이스 영문법》말이다. 매일 있는 일이지만, 그 책만 열었다하면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된 법칙이 글자 그대로 '한둘이 아니었다'. 그 법칙들이 잘못된 것은 아무도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따르지 않는 법칙이 어떻게 유효할 수 있겠는가?




결국 언어는, 법칙이 엄격히 지켜져야 하는 수학이 아니다. 언어는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것이다. 영어 용법의 정수는 법칙이 사람들을 따라가는 데 있는 것이지 사람들이 법칙을 따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강의 시간마다 나는 이 뻔한 사실을 스네이스 교수에게 소리쳐 말해주고 싶은 충동으로 온몸이 타오를 지경이었지만, 그의 첫 대면에서 받은 상처를 생각해서 평화를 지키곤 했다.




사실 평화가 아니었다. 내 마음속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언어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해서 그것이 부당하게 다루어지는 것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다시 스네이스 교수에게 항변하더라도 결국 똑같은 대답을 들을텐데, 그의 법칙을 깨는 사람은 촌뜨기요 상스러운 자들뿐이라고.




촌뜨기와 상스러운 사람들? 맙소사, 가장 저명한 학자이신 역사교수도 매일 to 부정사를 둘로 쪼개어서 쓰는데, 스네이스는 그에게도 촌뜨기라고 할 건가? 묵직한 햄처럼 여러 개의 학위를 엮어 갖고 있는 인류학 교수는 shall이 와야 할 곳에 will을 사용하고 문장 끝을 전치사로 마감하기 일쑤였다.




스네이스는 그에게도 상스러운 사람이라고 할 건가? 내가 듣는 강의의 교수들 모두가 위대한 문화화 지식을 습득한 사람들인데 이 학자들을 수준 낮은 사람들로 매도해 버릴 건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스네이스를 당황하게 만들어 내가 받은 수모를 되돌려 줄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교수들 5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자. 그들 모두에게 스네이스가 틀렸다고 말하는 문장들의 목록을 돌리자. 교수 한사람 한사람에게.




이 문장들 속에서 잘못된 점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자.당연히 못 찾겠지. 그리고 그 설문조사가 끝나는 대로 강의시간에 벌덕 일어나서 스네이스에게 그 결과를 제시하자. 이번에야말로 나를 기죽이지 못하리라. 이번에 비난을 가할 수 있는 것은 내 쪽이다.




"바로 그거야 ! " 나는 무릎을 치며 이렇게 외치고는 포피에게 달려가 그 계획을 전했다.

그녀는 내가 전한 희소식을 별 관심없이 들었다. 그러더니 호통을 쳤다.




"데체 언제쯤이나 쓸데없는 생각 그만두고 차 살 사람을 찾을거야?"

"설문조사가 끝나면 바로 찾을게." 이렇게 대답했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지금은 할 일이 너무 많아. 이건 정말 큰 일이야. 포피."




"그 일은 한푼 값어치도 없는 일이잖아." 그녀가 조소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포피. 그 늙은 스네이스를 파멸시키고 말거야. 너도 날 자랑스러워하게 될 걸. 두고 봐."




그녀는 여기서 옮길 수 없는 상스러운 소리를 했다.

포피가 전혀 지지를 보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일에 대단한 열의를 쏟아부었다.




우선 교재를 철저히 읽어 다음의 열 문장들을 뽑았다. 스네이스의 말에 따르면 모두 잘못된 문장들이었다.
I am anxious to go abroad. (스네이스는 anxious 대신에 eager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I anticipate trouble. (스네이스는 anticipate 대신 expect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I claim that I am taller than he is. (스네이스는 claim 대신 assert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I am surprised to see you (스네이스는 surprised 대신 astonished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He was too interested in her to notice me. (스네이스는 He was too much interested .... 가 옳다고 말했다.)
I doubt that it ever happened. (스네이스는 that 대신 whether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Under the circumstances I must agree. (스네이스는 in the circumstances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I was oblivious to his presence. (스네이스는 oblivious 대신 insensible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The two men greeted each other. (스네이스는 one another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I graduated from high school last year. (스네이스는 I was graduated from.... 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스네이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위에 인용한 열 개의 문장들이 모두 완벽하게 옳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설문조사는 내 신념이 옳다는 것을 철저히 입증해 주었다.




내가 인터뷰한 50명의 교수들 모두가 예외없이 그 문장들에서 잘못된 점을 찾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나에게 있어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나의 행복은 완전하지 못했다. 그것은 포피였다.




그녀는 악마처럼 내 어깨를 짓눌러댔다.

"이 바보 같은 설문조사를 언제 끝낼 셈이니?" 그녀는 쉬지 않고 보챘다. "차는 언제 팔거야? 언제? 언제? 언제?"




"이제 곧, 이제 곧, 이제 곧." 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거짓말을 하면서도 어떻게 달리 해볼 수도 없는 나의 무력감을 책망하곤 했다.




내가 차를 팔 생각이 없다고 자백했다가는 그녀는 곧 떠나버릴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옷이 여름옷으로 바뀌자 돈독이 오른 이 마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어차피 그녀가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시간을 질질 끌면서 그녀의 작고 울퉁불퉁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랬다.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포피를 달래는 동안 몇 주라는 시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설문조사를 끝냈을 때는 바야흐로 학기의 마지막 수업 전날이었다. 나는 그날 밤 늦게까지 설문조사 결과를 타이핑했다. 다음날 스네이스 교수의 수업에 들어갔을 때 나는 완전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포피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강철 같은 손아귀 힘으로 내 옷깃을 움켜잡았다.

"아직도 차를 못 팔았어?" 그녀는 을러대듯 물었다.




"쉬잇." 나는 이렇게 말하며 좀 더 나은 대답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쉬이, 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책은 이제 전부 사기만 하면 돼. 오늘은 수업 마지막 날이야. 오늘 돈이 있어야 된다구."




"수업 끝나고 얘기하자." 나는 말했다. 그때는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야 할 것이다. 아마 톡톡히 혼이 나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눈 앞에 놓여있는 승리의 순간을 만끽하고 싶을 뿐이었다.




바야흐로 스네이스와의 대혈투가 임박한 시점이었다. 이 전쟁에서는 승리밖에 있을 수 없었다. 내 쪽의 달콤한 승리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떨림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스네이스 교수는 교실 안으로 들어와서 강단에 섰다. 나는 손을 들었다.

"뭔가?"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몸을 돌려 학생들을 향해서도 미소지었다.

"교수님." 나는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된 사용법에 대해서 수많은 예들을 인용하고 싶은데요. 모두가 교재에서 뽑은 것입니다." 나는 열 개의 문장들을 줄줄이 읊었다. "교수님의 교재에 따르면 이것들은 모두 잘못된 문장입니다."




"물론이지." 그가 말을 가로챘다. "앉게."

"잠깐만요. 교수님. 잠깐만요. 우선 방금 제가 인용한 이 문장들이 모두 옳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누가 그런 소릴?" 그는 침을 튀기며 말했다.




나는 호주머니에 넣어둔 명단을 꺼내 과시하듯 그것을 폈다.

"다음과 같습니다. 문학 박사이신 제이슨 B. 에이버너디 교수. 문학사, 과학 박사, 법학 박사이신 마사 브로언 교수. 과학 석사, 벅박 박사, 문학 박사이신 찰스 O. 쉐빈스 교수...... 그리고 문학 박사인 에릭 즈윙리 교수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은 대놓고 킥킥 웃었다. 나는 알았다는 듯이 그들을 향해 기분 좋은 손짓을 해 보였다.

"자, 스네이스 교수님." 나는 태연히 손톱을 살펴 보면서 말했다.




"이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두 가지다." 그는 벽력치듯 말했다. "첫째, 이 대학 교수들은 문법적인 면에선 바보들이다. 둘째, 견디기 힘든 자네의 뻔뻔함 때문에 자네는 신입생 영어 과정에서 낙제 점수를 받게 됐다. 수업을 마친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죽일 수도 있을 듯한 눈초리로 쏘아보고는 재빨리 교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멋진 폼을 잡고 물 없는 수영장 속으로 다이빙한 사람 같았다.




나는 결딴이 났고, 뭉개졌고, 가루가 되어버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비실거리며 교실을 빠져나가 바깥의 거리로 걸어나갔다. 몇 대의 자동차에 치일 뻔 했는데 갑자기 포피가 나의 팔을 잡고 뒤로 홱 끌어당겼다.




"죽게 놔두지 그랬어?" 나는 대들듯이 말했다.

"힘 내."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그녀가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갔을 뿐이다. 그녀는 내 컨버터블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 차 속으로 밀어 넣고는 자신이 운전대를 잡고 달려갔다.




"중고차 판매상을 찾아가서 차를 팔자." 그녀가 말했다.

"마음대로 해." 나는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녀는 차를 끌고 스마일링 래트비언 중고차 시장으로 갔다. 우리를 본 주인이 쾌활하게 달려나왔다. 포피는 나긋나긋하게 구는 그의 행동에 넘어가지 않고 흥정을 했다.




나는 쿠션위에 늘어져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비참할 뿐이었다. 포피는 마침내 그 붙임성있는 슬라브인과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내 손에 펜 하나를 쥐어주면서 두툼한 서류에 서명하라고 했다. 나는 꿈 속에서처럼 몽롱하게 모든 것을 했다. 스마일링 래트미언 씨가 내게 화폐 한 다발을 건네주었고 포피는 그것을 얼른 낚아챘다. 우리는 걸어서 그곳을 나왔다.




"이제 책을 살 수 있겠다." 포피는 쾌활하게 손바닥을 비비면서 말했다.

"난 잠이나 자겠어."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그녀가 뭐라고 나를 제지하기도 전에 그곳을 떠났다.




열에 들뜬 시체 같은 몸을 이끌고 남자 기숙사로 돌아가 보니 뜻밖에 스네이스 교수가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몸을 움츠리고 벽에 기대어 서서 두려움에 입을 움직움직했다.




저 교수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내 눈에 염산이라도 뿌리려는 것일까?

그러나 그의 표정은 정겨웠고 심지어 수줍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오른팔을 뻗으면서 다가왔다.




"길리스 군. 사과하러 왔네. 오늘 강의 시간에 내가 혐오스러웠지? 물론 자네 말이 맞았어. 처음부터 자네 말이 맞았네."

"예?" 나는 쥐어짜는 소리를 했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오랫동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난 그걸 직면하려고 하지 않았네. 책의 개정판을 내려면 손이 많이 가지 않나. 헌데 나도 이제 젊지만은 않아서 말이야. 아마 그래서 내가 오늘 아침에 그렇게 불쾌했었나 보네. 자넨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두려워하고 있던 사실을 증명해 주었어. 개정판을 내야겠다는 걸 말이야."




'이게 꿈인가?' 나는 놀라서 말했다.

"아니지." 교수는 웃었다. "꿈을 꾼 사람은 나일세. 세상은 나를 그냥 스쳐 지나갔어. 하지만 길리스 군. 자네가 내 눈을 뜨게 해 주었네. 적어도 현실을 직시할 수는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 더이상 내게 주어진 일을 회피할 수 없어. 당장 시작할거야. 가을학기에는 《스네이스 영문법》의 개정판이 나올거야."




"아, 아, 이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눈길을 돌리며 그가 말했다.

"새로 낼 개정판을 자네에게 바쳐도 되겠나?"

"물론이죠." 나는 입이 찢어지라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당연하죠. 절대로요."




"고맙네. 길리스군. 자네 아주 친절하군."

"뭘요."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 자네는 이번 학기 영어 과목에서 낙제를 받지 않을 거야. 자네에게 A를 주겠네."

나는 아직 그와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그와 악수를 했다.




"잘 있게. 길리스 군. 가끔 차나 마시러 오게."

"그럼요." 나는 이렇게 외쳤고, 그가 가고 난 뒤에 달음박질로 세 번 방 안을 빙빙 돌았다. 어쩌면 서른세 번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행복해서 셀 수도 없었다.




나는 이 사실을 말해주려고 포피에게 갔다. 그녀를 찾느라 몇 시간이 걸렸지만, 너무나 기분이 좋아 그렇게 오래 그녀를 찾아 해메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기쁨으로 떨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껴안고 키스를 퍼부은 다음 그녀의 몸을 공중으로 높이 들어올렸다.




"포피,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야 ! "

"당연하지." 그녀가 대답했다. "넌 이제 굉장히 많이 변할테니까. 내가 내년 가을까지 보관해 둘 책 300권을 사고 돈을 지불했거든."

나는 참을 수 없다는 몸짓을 했다.




"그건 신경쓰지 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스네이스 교수가 나한테 사과를 했어. 이제껏 내가 옳았다는 거야. 영어에 A를 주겠대. 그리고 들어봐, 포피.... 새로 낼 개정판을 나한테 바치겠대 ! "




"뭐라구?" 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개정판 말이야." 내가 대답했다. "내 덕분에 개정판을 내게 됐대. 가을이면 개정판이 나온다고 하셨어."




그녀는 입을 딱 벌렸다. 그 얼굴이 음산한 흰빛으로 변했다.

"포피, 무슨 일이야?" 나는 놀라서 물었다.




"도비 ! "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가을에 개정판을 낸다구 ! " 그러면 이전의 책은 사용하지 않게 되잖아. 책을 300부나 사 놓았는데 ! "




나는 지금 미네소타 대학 2학년생이다. 지금은 포피를 만나지 않는다. 내가 그녀에게 아무런 악의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나는 그녀에게 감탄하고 있다. 내 컨버터블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포피는 내가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내고 미성년자에 의해 체결된 계약은 구속력이 없다는 사실도 생각해냈던 것이다. 법적으로, 내가 스마일랭 래트비언에게 돈을 되돌려준다면 그도 역시 내 차를 돌려줘야 하게 되어 있었다.




스마일링 래트비언에게 돈을 돌려주는 일이 좀 문제일 것 같았지만 포피는 그것 역시 해결했다 《스네이스 영문법》 300부를 해머스미서 서점에 모두 팔아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굉장한 소란을 피워가며 그에게 권당 2달러 50센트 대신 2달러 60센트의 돈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한푼도 손해보지 않았다.




모든 일이 정리되었을 때 나는 포피에게 감사를 느꼈지만, 우리의 로맨스는 여기서 그만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포피 역시 나에게 대단히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좋은 친구로 헤어졌다.




그 이후 그녀는 죽어라 쫓아다니는 다른 남자를 만났는데 이번 친구는 좀 더 그녀의 취향에 맞았던 듯하다. 그는 화학과 학생으로서 금속을 금으로 환원시키는 공식을 발견하기 위해 연구하는 중이었으니까.




나 또한 외롭지 않다. 내게 바쳐진 《스네이스 영문법》 개정판이 발간되자 나는 캠퍼스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 지식인들 속에는 물론 여학생도 많이 끼여 있었으며, 이들은 떼를 지어 찾아와 나를 귀찮게 했다.




이러한 부류의 여자애들은 외모 면에서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겠지만, 그래도 그 중에는 보기에 좀 덜 괴로운 애들도 약간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못생긴 여자를 골랐다. 그녀는 로라 맥카슬론이라는,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시인이었다. 우린 함께 있으면서도 매우 행복했다.




눈요기의 대상은 되지 못해도, 그 영혼은 얼마나 뛰어난가 !

얼마나 뛰어난가 !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파이썬으로 Homomorphic Filtering 하기

파이썬으로 Histogram matching 하기.